색깔있는 산악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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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이 분명한 산악사진가가 되자
디지털 카메라가 나온지 벌써 20여년이 훨씬 넘었다. 사람으로 말하면 20대 청년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촬영할만한 산에 가면 카메라맨이 많아 발디딜 틈이 없다. 요즘 눈(雪)의 계절이어서 엊그제 설경 촬영하러 가서 어렵게 촬영 포인트를 찾아 어떻게 찍어야할까 잠시 구상하고 있는 순간에 그 질감 좋은 바탕을 이리저리 산만하게 빙빙 돌아다니며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는다. 사진 찍는 사람으로써 너무 안타까워 시비도 붙는다. 그 사람은 사진에 자기 생각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기계라는 카메라를 이용해서 그곳의 현실은 무엇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데 만족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사진을 찍으러 간다면 최소한 촬영하러 가기 전에 그곳은 어떤 문화의 중심지이었는지, 또는 그 주변 사람들은 그곳을 어떻게 활용하며 살았는지 등등은 알고 가야하지 않는가 싶다. 이런 사실을 알고 촬영에 들어간다면 훨씬 의미 있는 사진을 촬영해 낼 것이다. 논어에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헛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라는 말이 있듯 우리는 천 번을 보고 천 번을 생각해서 한 장의 사진을 찍어 내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가 나온지 꽤 되었기 때문에 요즘 사진가들은 자기의 생각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특히 여러 장면을 찍어 의미 있는 한 장의 사진으로 탄생시킨다. 이런 사실을 볼 때 1826년 프랑스 조세프 니세포르 니엡스(Joseph Nicéphore Niépce, 1765~1833)가 8시간의 노출을 주어 사진을 탄생시켜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 조합인화를 통해 사진이 예술로 인정받게 된 때가 생각난다.
1839년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Louis-Jacques-Mandé Daguerre,1787~1851, 프랑스 미술가, 사진가)에 의해서 고안된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이 사진으로 처음 실용성 있게 되어 실용과 예술의 두 방향으로 1850~1870년대 뜨거운 논쟁이 되었다.
1850년대 사진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대량 복제와 기계를 통해 영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비평가이자 시인인 샤를르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 1821~1867)는 1859년 살롱 비평에서 사진은 산업이지 예술이 아니라고 비판의 선두에 섰다.
사진은 작가의 생각이나 상상을 표현할 수 없는 돈벌이의 기계문명이지 예술이 될 수 없다고 했던 것이다.
당시 낭만주의가 활발히 전개되던 시대에 예술이 인간의 고매한 정신세계를 나타낸다고 했고 인간은 개성과 꿈 그리고 상상력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아무런 고통없이 쉽게 대량으로 많은 장면을 생산할 수 있는 사진은 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스카 구스타브 fp일랜더(Oscar G Reilander 1813~1875)는 이 시기의 사진은 너무 사실적이고 산업생산 목적이라는 비판을 잠재우고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헨리 피치 로빈슨(Henrry Peach Robinson 1930~1901)은 여러 장의 사진을 자신의 상상력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합성 이미지를 만들었다. 또 fp일랜더는 이런 제작방법을 개성있게 활용하여 30장의 사진을 6주에 걸쳐 ‘권선징악’의 주제로 중간에 메시아와 같은 사람이 서 있고 앞쪽으로 두 청년을 주축으로 한 쪽은 선(善) 곧 자비, 성실, 미덕 등을 표현했고 다른 한 쪽은 악(惡) 곧 죽음, 도박, 술 등의 쾌락으로 조합인화를 통하여 한 장의 사진으로 ‘인생의 갈림길’이라는 제목으로 표현했다. 이 사진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극찬하며 구입했다. 이런 사실로 사진이 예술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오스카 G 레일랜더(1813~1875), < 인생의 갈림길 >1857, 30장의 음화로 조합한 사진
헨리 피치 로빈슨은 미리 머릿속에 회화적으로 스케치해서 모델로 하여금 연출하여 따로따로 촬영하여 조합인화 하는 방법을 썼다. 귀스타브 르 그레(Gustav Le Gray 1820~1884)가 조합인화의 효시였다면 오스카 G 레일랜더는 조합인화를 극대화시겼다고 본다.
사진이 태어나면서부터 예술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사진가들의 끈질긴 열정과 노력으로 예술이 되었던 것이다. 사진예술의 진입로에서 사진가들은 노출차로 여러 장면을 촬영하여 조합으로 한 장의 사진을 인화했다. 스웨덴에서 탄생하여 영국에서 활동했던 레일랜더는 유랑극단 단원들을 모델로 부분적으로 여러 장면을 촬영하여 한 작품으로 완성했다. 레일랜더와 로빈슨 사진은 예술을 추구하는 것은 같았지만 주제와 조합인화 방식이 달랐다. 이 시기에 이런 방식으로 작화한 사진가들이 많이 나왔으며 특히 자연주의 사진가 피터 헨리 에머슨(Perter Henry Emerson 1856~1936)의 예술적 시각에 많은 사진가들이 그 영향을 받아 픽토리얼즘(Pictorialism, 회화주의)도 탄생하고 사진이 완전히 예술로 등장했다. 1890년대 미국이나 유럽 등 각국 사진클럽에서 살롱 활동이 활발했다. 피터 헨리 에머슨, 알프레드 스티클리츠, 에드워드 스타이겐, 엘빈 랭든 코번, 프랭크 유진, 로베르 드마시, 콩스탕 퓌요 등은 ‘291화랑’, ‘사진분리파’, ‘회화적 사진’ 등의 활약이 눈부셨다.
우리는 주로 미국에서 활동한 에드워드 스타이겐(Edward Stejchen (1879~1973), 폴 스트랜드(Paul Strand 1890~1976), 에드워드 웨스턴(Edward Weston 1886~1958), 안셀 아담스(Ansel Adams 1902~1984), 마이너 화이트(Minor White 1908~1976), 로버드 프랭크(Robert Frank 1929~ ),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 1929~ )등 이 분들을 주목할 요가 있다. 요즘 인터넷이 잘 보급되어 어디서나 정보수집이 어렵지 않다. 예를들어‘ www.photoman.co.kr , http://offzine byus.net/zboard.php (Photo-Artist)’등 검색만하면 정보가 쏟아진다.
우리 나라에서도 사진은 기계가 찍기 때문에 같은 장소에서 여러 사람이 찍는다면 똑 같은 사진이 나오기 때문에 예술이 아니라고 타 예술 장르 작가 들이 어리석은 혹평을 했던 적이 있다. 음악이나 미술 등 다른 예술가들은 천재가 있지만 사진가는 천재가 없다고 한다. 곧 사진에서는 끈기 있는 노력이 천재를 능가한다는 말이다. 이런 아픔을 볼 때 우리 산악사진가는 기계라는 카메라 뒤에서 사진가의 생각과 개성과 영감을 담아 미학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을 탄생시켜야 한다.
참고 문헌
0 <사진예술의 역사>, 장뤽다발 작, 박주석 옮김, 미진사
0 <세계사진사>, 장-클로드 르마니 앙드레 루이예 편저, 정진국 옮김,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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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등록일 2013.02.09 21:06
chugger/이종건님의 댓글
즐거운 연휴...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그렇게 그렇게 세상도 바뀌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