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백남오님의 수필. 지리산의 만추.
컨텐츠 정보
- 19,632 조회
- 목록
본문
산악인이며 수필가이신 한국문인협회의 수필가 백남오님이
한국 산악 사진 작가 협회 창립 축하 선물로 귀한 옥고를 2편 보내주셨습니다
백남오님은 경남대 국문학 대학원을 졸업하시고 현재 사)시사랑문화회.
한국 문인 협회 회원이시며. 마산 무학 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계신 중견 수필가이십니다.
지리산을 200여회 등정하신 지리산인이시고 현재 "지리산 수필집"을 탈고하였습니다
玉稿를 본 협회 창립 축하 글로 주셔서 감사의 말씀올림니다.
지리산의 만추(晩秋)
백 남 오/수필가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그립고 아련한 지리산의 여운을 혼자서 감당하기는 어려울 성싶다. 하고 또 해도, 다시 하고 싶은 것이 지리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 삶에 있어 지리산은 그런 것이다.
시월의 마지막 일요일, 이른 새벽부터 꿈결같이 배낭을 꾸린다. 사십대의 마지막 지리산 산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고교시절 제주도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처럼 가슴이 설렌다. 미명(未明)을 헤치고 오랜 산 친구 신근이와 마산을 빠져 나와 지리산을 향하여 달린다. 새벽의 남해고속도로는 한적하고 바람은 상쾌하다. 종종 안개 때문에 고역을 치르기도 하지만 날씨도 청명하다. 지리산에는 이미 눈이 내렸고, 오늘의 날씨는 제법 쌀쌀하겠으나 화창한 가을 날씨를 보여줄 것이라 한다. ‘새재’에서 출발하여 지리산 동부 능선인 ‘쑥밭재’와 ‘하봉’을 거쳐 ‘조개골’로 하산하는 것이 산행의 일정이다.
'위새재' 마을에서 오른편 '새재'를 향하여 오르는 길목에는 푼푼스러운 쑥부쟁이와 노란 마타리, 하얀 구절초 같은 야생화들이 군데군데 무더기로 군락을 이루어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겨주고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하늘이 검은 구름으로 뒤덮이더니 흰 눈이 한 송이씩 날리기 시작한다. 올해의 첫눈을 지리산에서 맞이하는가 싶다. 상서로운 눈이다. 오늘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한 반시간 지나 달력 속의 사진같이 아름다운 작은 세계, ‘새재’에 도착한다. 날아가는 새도 쉬어 간다는 새재는 이미 백설의 평원으로 변해있다. 파란 구상나무의 키 작은 묘목 위에는 하얀 눈이 덮여있고 오른쪽 양지바른 넓은 언덕의 파란 풀 위에도 흰 눈이 쌓였다. ‘녹의홍상’이 아니라 ‘백의녹상’이다. 선명한 색채의 대조가 정갈하면서도 산뜻하다. 계절은 분명 가을의 한가운데인데 파란 풀 위에 하얗게 덮인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지금 지리산에는 사계절이 공존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북쪽으로 난 능선을 따라 오른다. 온통 키 작은 산 죽 밭이다. 제법 많은 눈이 쌓여 미끄럽고, 바람도 세차게 분다. 뒤돌아보니 ‘왕등재’의 긴 능선과 백설 속의 ‘외고개’가 운무 속에서 수줍게 조망된다.
오르막이 일단락 끝나는 곳부터는 편한 길이다. 전망 좋은 바위가 눈 속에 묻혀있다. 무엇에 이끌리듯 바위 위로 올라선다. 오른쪽으로는 노랗게 물든 가을들판이 몰아치는 눈보라사이로 언뜻언뜻 보인다. 부잣집 곶간 같은 가을 들녘이 넉넉하다. 아마도 함양군 휴천면 일대인 것 같다. 풍요로운 들판을 바라보니 갑자기 평생 농부로 사신 부모님 생각이 난다. 왼편 조개골 쪽에서는 부분적으로 햇빛이 일직선으로 나타났다가 이내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날씨가 아주 불안정하다. 다시 바람이 불고 기온이 급강하하며 하얀 눈송이와 함께 주변은 영화의 장면처럼 안개 속에 묻힌다. 계속되는 능선을 오르며, 얼어붙은 바위지대를 조심스럽게 통과하기도 한다.
물결에 흔들리는 배처럼 내리막 오르막을 몇 번 반복을 하니, 저 위 눈(雪)으로 꽃핀 능선의 전경이 한 폭의 수묵화로 다가온다. 여기쯤 어디선가 그 위치에 대하여 말도 많은 ‘쑥밭재’가 나타날 차례다. 재는 바람이 많이 불고 네 갈래 길이 나있다. 그리고 평평한 안부(鞍部)다. 바로 위 고지에 오르니 갑자기 가슴이 탁 트인다. 바로 밑 안부, 쑥밭재가 틀림없다. 위로 펼쳐지는 넓고 평평한 산줄기는 하봉 능선을 향하여 진득하게 누워있고, 주변 나무에는 하얀 설화가 운무와 함께 성대한 가을잔치를 벌이고 있다. 장엄하다할까, 화려하다할까. 아니, 장엄, 화려, 우아, 섬세, 그 모두를 다 아우르고 있다는 말이 옳을 것 같다. 나무 가지 위에 핀 설화의 모습이 마치 수 만개의 작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새 솜으로 뽑아낸 하얀 실로 지리산의 모든 나무들을 함께 묶어 연결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가을설화를 맞이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쑥밭재’로 내려선다. 쑥밭재, 정겨운 우리말이름, 얼마나 오고 싶어 했던 곳인가. 신라의 화랑도가 무예와 수련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곳, 그래서 민족의 역사와 혼이 살아 숨쉬는 산으로 자리 매김 되고 있는 곳, 하지만 쑥밭재에는 알 수 없는 적막감과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만 세차게 몰아치고 있을 뿐이다. 귀가 시리고 온 몸이 꽁꽁 얼어붙는 것 같은 추위가 몰려온다. 가을산행을 준비했는데, 아직도 겨울은 저만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리산은 어느새 한겨울의 중심에 서있다. 집에 두고 온 겨울 털모자가 한없이 그립지만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다. 문득 인생(人生)이란 단어가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우리 인생의 황혼도 어느 날 예고 없이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영원히 사십 자락에서 머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인생의 끝은 이미 다가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늘 깨어 있어야한다는 어느 분의 말씀이 추위 속에서 더 또렷하게 되새겨진다. 지리산은, 스승이 되어 이렇게 큰 교훈으로 품어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바람 속에서도 태고의 신비감이 감도는 쑥밭재를 뒤로하고 그 황홀한 능선을 쉬엄쉬엄 올라가는데, 내려오는 산꾼 한 사람을 만난다. 키만 한 배낭을 짊어지고 눈 내리는 지리산 동부능선을 홀로 걷는 모습이 오늘따라 한없이 고적해 보인다.
드디어 국골 사거리, 기나긴 지리산 태극종주가 완성되는 것이다. 20년 지리산 산행의 결실을 맺는 감동의 순간이기도 하다. 인월 덕두산에서 바래봉, 만복대, 노고단, 천왕봉, 중봉, 하봉, 쑥밭재, 새재, 왕등재, 밤머리재, 웅석봉까지 이어지는 그립고 머나먼 길을, 나의 두발로 모두 걸어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지리산에도 어지간히 다녔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하봉을 향해서 ‘두류능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바람은 더 거세고 체감온도는 영하 십도는 족히 넘을 것 같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고 험난하다.
무려 네 시간 이상, 육체적으로는 고통의 극치에서 ‘하봉’ 정상에 우뚝 선다. 눈보라와 추위 때문에 잠깐도 버티고 서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지리산의 설경과 설화의 절정을 나는 여기서 맛본다. 지난가을, 바로 이 자리에서 ‘중봉’ 쪽 언덕을 바라보며 ‘수줍은 듯 미소 짓는 단풍, 죽어서도 묻어둘 그리움.....등’으로 예찬했는데 바로 앞 작은 봉우리는 수줍음과 그리움을 잃어버렸다. 그 자리에는 억센 눈보라만 사정없이 휘몰아치고 방어할 태세도 미처 갖추지 못한 나무들은 거대한 폭격을 당하고만 있는 것 같다.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과 추함과 영욕과 사랑과 질투를 한 자리에 모아놓고, 조물주께서는 추위와 눈보라와 강풍으로 내리치고 있는 것이다. 눈보라를 맞는 산의 모습이 처절하고도 아름답다. 마치 총탄이 쏟아지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느끼는 가학적(加虐的) 아름다움 같은 것이라 할까. 오히려 비장미(悲壯美)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마음속에 일렁이는 야수성(野獸性)에 깜짝 놀라면서 참으로 진실하게 살아야겠다는 나의 이기적인 다짐도 몇 번이나 해보고 있는 것이다. 하봉과 중봉 사이의 안부에 도착하니 한바탕 치르고 난 전쟁 뒤의 평화 같은 기분이다. 좌측으로 난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산행은 출발부터 계속 오르막길만 올라온 셈이다. 앞만 보고 살아온 내 삶의 역정(歷程)같다. 어느새 계곡의 물소리도 소록소록 들린다. 조개골의 상류가 시작되는가 보다.
‘조개골’은 쑥밭재와 새재 아래로 중봉과 하봉 줄기의 물을 모아 대원사계곡으로 흘러내리는 깨끗하고 낭만적인 계곡이다. 특히 초가을의 단풍은 잠시 잊었던 추억처럼 보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계곡을 세 번 정도 횡단하며 한 시간 정도를 쉼 없이 내려오니 조개골 본류가 기다린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위 새재 마을까지, 거짓말처럼 가을이 절정으로 무르익고 있다. 갑자기 시간이 되돌아 지리산의 만추(晩秋)가 또다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싱그러운 단풍의 원시림이 하늘을 가린다. 잎이 큰 도토리나무, 키가 크고 잎이 얇은 노란 도토리 나무, 머루와 다래 넝쿨, 분홍빛 단풍나무, 빨갛게 물든 옻나무, 빨간 단풍나무, 유달리 새빨간 피 빛 같은 단풍나무도 띄엄띄엄 보인다. 길은 평탄하고 발걸음도 아주 가볍다. 길 위에는 단풍으로 된 낙엽이 수북히 쌓여 편안한 감촉을 전해준다. 오른쪽으로는 조개골의 계류가 길 따라 흐른다. 눈을 돌리면 빨간 단풍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계곡의 파란 물이 생동감을 더해준다. 살아 퍼덕이는 가을의 모습이다. 가을 축제를 준비하는 여고생의 모습 같다. 단풍의 터널은 무려 십리도 넘게 계속된다.
늦은 오후, '위새재' 마을로 원점회귀 한다. 지리산 국립공원 대원사 매표소를 통과 할 때는 파란 가을 하늘 위에서 눈부신 햇살이 박수같이 쏟아져 내린다. 덕산을 지나니 마을 어귀의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빨간 감의 모습이 올해도 저물어 가고 있음을 알려 준다. 갑자기 외롭고 쓸쓸해 눈물이 나려한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운무와 설화 속에서 헤매었던 순간들이 마치 꿈결처럼 느껴진다. 우리 인생의 한평생 삶이란 것도 지나고 나면 이처럼 꿈같을 것임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내 삶의 기쁨도 고통도 결국은 모두가 꿈같으리라, 꿈.
한국 산악 사진 작가 협회 창립 축하 선물로 귀한 옥고를 2편 보내주셨습니다
백남오님은 경남대 국문학 대학원을 졸업하시고 현재 사)시사랑문화회.
한국 문인 협회 회원이시며. 마산 무학 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계신 중견 수필가이십니다.
지리산을 200여회 등정하신 지리산인이시고 현재 "지리산 수필집"을 탈고하였습니다
玉稿를 본 협회 창립 축하 글로 주셔서 감사의 말씀올림니다.
지리산의 만추(晩秋)
백 남 오/수필가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그립고 아련한 지리산의 여운을 혼자서 감당하기는 어려울 성싶다. 하고 또 해도, 다시 하고 싶은 것이 지리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 삶에 있어 지리산은 그런 것이다.
시월의 마지막 일요일, 이른 새벽부터 꿈결같이 배낭을 꾸린다. 사십대의 마지막 지리산 산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고교시절 제주도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처럼 가슴이 설렌다. 미명(未明)을 헤치고 오랜 산 친구 신근이와 마산을 빠져 나와 지리산을 향하여 달린다. 새벽의 남해고속도로는 한적하고 바람은 상쾌하다. 종종 안개 때문에 고역을 치르기도 하지만 날씨도 청명하다. 지리산에는 이미 눈이 내렸고, 오늘의 날씨는 제법 쌀쌀하겠으나 화창한 가을 날씨를 보여줄 것이라 한다. ‘새재’에서 출발하여 지리산 동부 능선인 ‘쑥밭재’와 ‘하봉’을 거쳐 ‘조개골’로 하산하는 것이 산행의 일정이다.
'위새재' 마을에서 오른편 '새재'를 향하여 오르는 길목에는 푼푼스러운 쑥부쟁이와 노란 마타리, 하얀 구절초 같은 야생화들이 군데군데 무더기로 군락을 이루어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겨주고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하늘이 검은 구름으로 뒤덮이더니 흰 눈이 한 송이씩 날리기 시작한다. 올해의 첫눈을 지리산에서 맞이하는가 싶다. 상서로운 눈이다. 오늘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한 반시간 지나 달력 속의 사진같이 아름다운 작은 세계, ‘새재’에 도착한다. 날아가는 새도 쉬어 간다는 새재는 이미 백설의 평원으로 변해있다. 파란 구상나무의 키 작은 묘목 위에는 하얀 눈이 덮여있고 오른쪽 양지바른 넓은 언덕의 파란 풀 위에도 흰 눈이 쌓였다. ‘녹의홍상’이 아니라 ‘백의녹상’이다. 선명한 색채의 대조가 정갈하면서도 산뜻하다. 계절은 분명 가을의 한가운데인데 파란 풀 위에 하얗게 덮인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지금 지리산에는 사계절이 공존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북쪽으로 난 능선을 따라 오른다. 온통 키 작은 산 죽 밭이다. 제법 많은 눈이 쌓여 미끄럽고, 바람도 세차게 분다. 뒤돌아보니 ‘왕등재’의 긴 능선과 백설 속의 ‘외고개’가 운무 속에서 수줍게 조망된다.
오르막이 일단락 끝나는 곳부터는 편한 길이다. 전망 좋은 바위가 눈 속에 묻혀있다. 무엇에 이끌리듯 바위 위로 올라선다. 오른쪽으로는 노랗게 물든 가을들판이 몰아치는 눈보라사이로 언뜻언뜻 보인다. 부잣집 곶간 같은 가을 들녘이 넉넉하다. 아마도 함양군 휴천면 일대인 것 같다. 풍요로운 들판을 바라보니 갑자기 평생 농부로 사신 부모님 생각이 난다. 왼편 조개골 쪽에서는 부분적으로 햇빛이 일직선으로 나타났다가 이내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날씨가 아주 불안정하다. 다시 바람이 불고 기온이 급강하하며 하얀 눈송이와 함께 주변은 영화의 장면처럼 안개 속에 묻힌다. 계속되는 능선을 오르며, 얼어붙은 바위지대를 조심스럽게 통과하기도 한다.
물결에 흔들리는 배처럼 내리막 오르막을 몇 번 반복을 하니, 저 위 눈(雪)으로 꽃핀 능선의 전경이 한 폭의 수묵화로 다가온다. 여기쯤 어디선가 그 위치에 대하여 말도 많은 ‘쑥밭재’가 나타날 차례다. 재는 바람이 많이 불고 네 갈래 길이 나있다. 그리고 평평한 안부(鞍部)다. 바로 위 고지에 오르니 갑자기 가슴이 탁 트인다. 바로 밑 안부, 쑥밭재가 틀림없다. 위로 펼쳐지는 넓고 평평한 산줄기는 하봉 능선을 향하여 진득하게 누워있고, 주변 나무에는 하얀 설화가 운무와 함께 성대한 가을잔치를 벌이고 있다. 장엄하다할까, 화려하다할까. 아니, 장엄, 화려, 우아, 섬세, 그 모두를 다 아우르고 있다는 말이 옳을 것 같다. 나무 가지 위에 핀 설화의 모습이 마치 수 만개의 작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새 솜으로 뽑아낸 하얀 실로 지리산의 모든 나무들을 함께 묶어 연결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가을설화를 맞이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쑥밭재’로 내려선다. 쑥밭재, 정겨운 우리말이름, 얼마나 오고 싶어 했던 곳인가. 신라의 화랑도가 무예와 수련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곳, 그래서 민족의 역사와 혼이 살아 숨쉬는 산으로 자리 매김 되고 있는 곳, 하지만 쑥밭재에는 알 수 없는 적막감과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만 세차게 몰아치고 있을 뿐이다. 귀가 시리고 온 몸이 꽁꽁 얼어붙는 것 같은 추위가 몰려온다. 가을산행을 준비했는데, 아직도 겨울은 저만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리산은 어느새 한겨울의 중심에 서있다. 집에 두고 온 겨울 털모자가 한없이 그립지만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다. 문득 인생(人生)이란 단어가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우리 인생의 황혼도 어느 날 예고 없이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영원히 사십 자락에서 머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인생의 끝은 이미 다가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늘 깨어 있어야한다는 어느 분의 말씀이 추위 속에서 더 또렷하게 되새겨진다. 지리산은, 스승이 되어 이렇게 큰 교훈으로 품어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바람 속에서도 태고의 신비감이 감도는 쑥밭재를 뒤로하고 그 황홀한 능선을 쉬엄쉬엄 올라가는데, 내려오는 산꾼 한 사람을 만난다. 키만 한 배낭을 짊어지고 눈 내리는 지리산 동부능선을 홀로 걷는 모습이 오늘따라 한없이 고적해 보인다.
드디어 국골 사거리, 기나긴 지리산 태극종주가 완성되는 것이다. 20년 지리산 산행의 결실을 맺는 감동의 순간이기도 하다. 인월 덕두산에서 바래봉, 만복대, 노고단, 천왕봉, 중봉, 하봉, 쑥밭재, 새재, 왕등재, 밤머리재, 웅석봉까지 이어지는 그립고 머나먼 길을, 나의 두발로 모두 걸어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지리산에도 어지간히 다녔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하봉을 향해서 ‘두류능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바람은 더 거세고 체감온도는 영하 십도는 족히 넘을 것 같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고 험난하다.
무려 네 시간 이상, 육체적으로는 고통의 극치에서 ‘하봉’ 정상에 우뚝 선다. 눈보라와 추위 때문에 잠깐도 버티고 서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지리산의 설경과 설화의 절정을 나는 여기서 맛본다. 지난가을, 바로 이 자리에서 ‘중봉’ 쪽 언덕을 바라보며 ‘수줍은 듯 미소 짓는 단풍, 죽어서도 묻어둘 그리움.....등’으로 예찬했는데 바로 앞 작은 봉우리는 수줍음과 그리움을 잃어버렸다. 그 자리에는 억센 눈보라만 사정없이 휘몰아치고 방어할 태세도 미처 갖추지 못한 나무들은 거대한 폭격을 당하고만 있는 것 같다.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과 추함과 영욕과 사랑과 질투를 한 자리에 모아놓고, 조물주께서는 추위와 눈보라와 강풍으로 내리치고 있는 것이다. 눈보라를 맞는 산의 모습이 처절하고도 아름답다. 마치 총탄이 쏟아지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느끼는 가학적(加虐的) 아름다움 같은 것이라 할까. 오히려 비장미(悲壯美)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마음속에 일렁이는 야수성(野獸性)에 깜짝 놀라면서 참으로 진실하게 살아야겠다는 나의 이기적인 다짐도 몇 번이나 해보고 있는 것이다. 하봉과 중봉 사이의 안부에 도착하니 한바탕 치르고 난 전쟁 뒤의 평화 같은 기분이다. 좌측으로 난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산행은 출발부터 계속 오르막길만 올라온 셈이다. 앞만 보고 살아온 내 삶의 역정(歷程)같다. 어느새 계곡의 물소리도 소록소록 들린다. 조개골의 상류가 시작되는가 보다.
‘조개골’은 쑥밭재와 새재 아래로 중봉과 하봉 줄기의 물을 모아 대원사계곡으로 흘러내리는 깨끗하고 낭만적인 계곡이다. 특히 초가을의 단풍은 잠시 잊었던 추억처럼 보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계곡을 세 번 정도 횡단하며 한 시간 정도를 쉼 없이 내려오니 조개골 본류가 기다린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위 새재 마을까지, 거짓말처럼 가을이 절정으로 무르익고 있다. 갑자기 시간이 되돌아 지리산의 만추(晩秋)가 또다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싱그러운 단풍의 원시림이 하늘을 가린다. 잎이 큰 도토리나무, 키가 크고 잎이 얇은 노란 도토리 나무, 머루와 다래 넝쿨, 분홍빛 단풍나무, 빨갛게 물든 옻나무, 빨간 단풍나무, 유달리 새빨간 피 빛 같은 단풍나무도 띄엄띄엄 보인다. 길은 평탄하고 발걸음도 아주 가볍다. 길 위에는 단풍으로 된 낙엽이 수북히 쌓여 편안한 감촉을 전해준다. 오른쪽으로는 조개골의 계류가 길 따라 흐른다. 눈을 돌리면 빨간 단풍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계곡의 파란 물이 생동감을 더해준다. 살아 퍼덕이는 가을의 모습이다. 가을 축제를 준비하는 여고생의 모습 같다. 단풍의 터널은 무려 십리도 넘게 계속된다.
늦은 오후, '위새재' 마을로 원점회귀 한다. 지리산 국립공원 대원사 매표소를 통과 할 때는 파란 가을 하늘 위에서 눈부신 햇살이 박수같이 쏟아져 내린다. 덕산을 지나니 마을 어귀의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빨간 감의 모습이 올해도 저물어 가고 있음을 알려 준다. 갑자기 외롭고 쓸쓸해 눈물이 나려한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운무와 설화 속에서 헤매었던 순간들이 마치 꿈결처럼 느껴진다. 우리 인생의 한평생 삶이란 것도 지나고 나면 이처럼 꿈같을 것임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내 삶의 기쁨도 고통도 결국은 모두가 꿈같으리라, 꿈.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