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에세이

지리산 풍경사진연구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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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 논문은 본협회 고문이신 엄영섭 고문님의 석사 학위 논문입니다.
엄영섭고문님은  산악사진계에서는 최초로 산악사진을  학문으로써 정립한
작가이십니다....


                                                      -    국 문 초 록    -

  지리산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잘 어울리는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4천 6백여 종의 소산식물(所産植物)중 30여 %가 지리산에서 연중 계절에 따라 잎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각양각색의 색채로 변화 한다. 그리고 고봉준령(高峰峻嶺)의 산이라 하더라도 험준(險峻)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다. 오히려 아름답고 정감이 넘치며 산에 들어서면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느끼지 못하는 포근하고 아늑함을 느낀다. 계곡의 흐르는 물은 억겁(億劫)의 세월로 깎아 만든 기암과 괴석과 소(沼)와 폭포에 봄이 오면 신록과 화사한 꽃들이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그리고 여름이면 싱그러운 초목은 울창하게 자라 우리에게 위안(慰安)을 주고, 가을이면 만산홍엽(滿山紅葉)이 넉넉한 마음을 갖게 한다. 그리고 겨울 역시 온 산천초목(山川草木)을 잠재울 수 있는 백설이 펄펄 내리면 모든 예술의 근간(根幹)을 이룬다. 
 동양인과 서양인은 자연관(自然觀)이 다르다. 서양인들은 자연을 정복하고 분석하여 개발하려는 사상으로 인간중심의 시각을 갖는 반면, 동양인은 자연을 보존하며 그곳에서 안식처를 찾으려는 자연숭배의 시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서양의 예술가들은 자연을 동경하고 찬양하며, 자연에 도취되어 자연에서 체험을 재현하는 삶이 같다. 동․서양인들은 그 나름대로 자연에 몰입(沒入)되고 자연에 융화되어 하나가 되려는 생활 속에서 동․서양 특유의 사상을 발전시켜 자연의 정기(精氣)를 화폭에 담으려했다. 
  안셀 아담스는 초인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보았다. 위대한 공간, 폭포, 비범한 산, 그리고 거대한 힘에 대한 두려움 등 자연의 숭고함 곧 광대함, 아담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존하려는 입장에서 서부 여러 곳의 풍경을 촬영하였고 자연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시선과 사색적, 음악적, 철학적 풍경사진을 만들어 냈다. 
 마에다 신죠우(前田眞三)는 풍경사진을 문학적인 근원을 통하여 읽어내려 했다.  곧 날카로운 시선과 민활한 눈짓으로 풍경사진을 만들어 냈다.
  우리나라에서도 19세기 말 금강산 촬영과 1920년대 백두산 탐험대에서 활동한 사진가들이 시간과 공간, 새로운 영상미로 승화시켜 자연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자하는 개성이 드러나 있다. 대자연의 장엄함과 힘찬 모습을 주제로 한 작품과 추상화된 공간 속에 작가 자신의 내면적 세계를 반영시킨 심상풍경(心象風景)도 나타났으며, 1950년대부터는 임석제를 비롯하여 산악사진가들이 등장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본인은 지리산을 통하여 컬러(color)를 제대로 발색, 재현하기 위해서 린호프 테크니카 4x5 카메라를 사용했으며 적재적소(適材適所)의 장면에 따라 QUICKLOAD FILM 4x5와 RVP 220을 6ⅹ12로 표현했다. 컬러를 사용한 것은 어떤 왜곡이나 거짓 없이 색채의 조화를 잘 이루었고, 만물(萬物)의 보금자리인 지리산, 지금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는데 빛을 가장 중요시했다. 
 지리산은 아름다움에 앞서 아픔과 희망과 삶의 터전이자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왔고, 자연생태의 보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 같은 따뜻한 품속이었다.  본인의 풍경작업을 지리산으로 택했던 것은 이런 이유도 있지만 조선시대에 이륙, 김종직, 남효온, 조식 등이 지리산에 올라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기행문을 남겼고, 선비문화를 꽃피웠다. 또한 대대로 살아온 우리 조상들의 삶의 터전이었으며, 이곳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겸재 정선도 오방색을 풀어 남종화와 북종화를 개척해 독보적인 조선의 진경산수를 창출해냈듯이 본인의 풍경사진 작업에서도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의 정신을 본받고 안셀 아담스(Ansel Adams)와 마에다 신죠우(前田眞三)의 풍경사진의 시각을 절충하여 우리나라 산악사진가들의 맥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래서 지리산에 배어있는 본질을 읽고, 자아에 내재되어 있는 풍경의 이미지를 산수화의 이론과 풍경사진 기법의 특성을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수량이 풍부하고 명성이 높은 계곡이나 폭포, 그리고 풍경이 뛰어난 곳도 좋지만 그곳에서는 개성적인 표현이 어려울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평범한 곳에 관심을 갖고 매력적인 장면을 찾아 아름다운 지리산을  참신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기후에 따라 다양하게 연출되는 장면을 파노라마(panorama) 형식으로 표현하였고, 본 연구를 통하여 자연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자연 친화적인 삶을 탐구하고자 했다. 아름다운 지리산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가져 우리 자연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지리산 본래 그대로의 모습, 우리들의 삶의 터전 그대로의 모습을 영원히 보존하고자 한다. 




                목      차
Ⅰ 서론
1.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 2

Ⅱ 본론
1. 풍경사진 ----------------------------------- 3
  1)산수화와 풍경사진 -------------------------- 6
  2)한국의 풍경사진 ---------------------------- 9
  3)미국의 풍경사진 --------------------------- 13
2. 지리산 풍경의 이미지(image)
  1)지리산의 배경 ----------------------------- 18
    (1)역사적 ‧ 문화적 배경 --------------------- 19
    (2)생태적 특징 ---------------------------- 23 
 3. 작품의 전개와 분석
  1)작품의 전개 ------------------------------ 25
  2)작품의 분석 ------------------------------ 27

Ⅲ 결론 ------------------------------------- 33
  * 참고문헌 -------------------------------- 36
  * 사진도판 목록 ---------------------------- 38
  * Abstract ------------------------------------- 50
 
Ⅰ 서론

  자연 훼손을 최소화 하면서 국토를 개발한 스위스는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보호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림 같은 풍경을 가꾸어 지구상에서 가장 우수한 관광나라를 건설하였다. 자연과 과학, 그리고 예술이 공존하는 스위스 융프라우와 프랑스 몽블랑의 개발과정은 우리에게 커다란 과제를 준다. 그 뿐 아니라 ‘조국의 강산이 황폐해지면 독일의 국민정신이 허물어지고 독일은 독일이 될 수 없다고’ 외쳤던 철학자 ‘피히테’ [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의 말처럼 ‘독일의 정신 그 자체’인 숲을 헌신적인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흑림지대를 보면 너무도 감동적이고 교훈적이다.
 환경심리학자인 ‘로저 울리치’ 교수는 ‘숲이 사람의 원기를 회복시키고, 활력을 증진시키며, 스트레스를 없애주는 살아있는 묘약’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숲은 맑은 공기를 발산시켜 우리들의 기분을 상쾌하게 하고, 마음을 열어 대화를 쉽게 이루어지게 하는 메신저이다.
 우리의 감수력은 시스템이 쉬었을 때 일을 더 잘 한다. 하루 종일 일만 한다면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탈진한다. 지질학자 클래런스 킹(Clarence King 1842~1901)은 캘리포니아의 틴달산(Mount Tyndall)의 등반 첫날의 경험 뒤 그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이런 피곤한 운동 후 마음은 이상할 만큼 깨끗하다. 이것은 완전히 몸 안에서 나온 것인지 혹은 산 공기가 강력하게 생명을 준 것인지 피로를 말끔히 제거해 준다.’
 지구촌에서 우리나라 자연처럼 아기자기 하고, 인위적인 분위기 없이 아름다운 자연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대지의 식물은 봄이 되면 모두 소생(蘇生)하여 온갖 풍우대작을 겪어가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자생한다. 곧 자연은 모든 생명을 낳아 성장시키고 무한한 신비감으로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기계화된 현대문명 속에서도 자연을 동경하고 존중하며, 자연 친화적인 동반자가 되고자 한 것은 답답한 생활 속에서 한계를 느껴 보다 여유로운 생활을 찾고자 하는 욕망이다.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도모한 미묘하고 상쾌한 감정과 아름다운 세계를 탐색하려는 의지에서 온 행동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을 좋아하고 산을 찾으며 미래를 설계한다. 우리의 이러한 삶이 곧 예술로 탄생한다.
 
  1.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 사람들은 말이 많으나 청산은 말이 없다.(人口多辯 靑山無言) ― 산은 쓴 소리 단 소리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산이 좋은 이유 중 하나이다. 우리 조상들은 전라남도 곡성 지리산 자락에 삶의 터전을 이루고 대대로 살아 왔다. 그리고 우리들은 산에 올라 꿈을 키우며 성장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터를 가꾸고 땔감을 나르며 지리산 자락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자연과 친숙해졌으며 지리산을 닮아가는 것인지 그곳이 평화로운 삶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삶의 일상에서 본 지리산은 기후에 따라 빛에 따라 미묘하게 아름다운 광경이 자주 펼쳐져 많은 감동을 받았다. 지리산은 둘레가 320여km 최고봉의 높이가 해발 1915m가 되는 높은 산이다. 이렇게 큰 산에서 작업을 하려면 사진가이기 전에 탐험가와 등산가가 되어야 한다. 높은 지리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또 산속에 들어가 오랜 기간을 머무르며 작업을 해야 한다. 이러한 지리산에 대한 내면의 세계를 숨김없이 카메라를 통하여 베껴내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삶의 일부가 되어 예술적인 측면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며, 더 깊이, 더 높이 접근하게 되었다. 그러나 카메라 장비의 기본적인 무게는 20여kg, 거기에 취사도구, 또 동절기에는 겨울 장비를 더하면 40여kg이 될 때가 있기 때문에 강한 체력과 의지가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은 장인 정신이 아니고서는 어렵다. 하지만 마음에 흡족한 장면을 포착하기란 쉽지 않다. 봄이면 황사현상으로 시야가 나쁠 때가 있고, 여름이면 장마기간이 있고, 가을이면 환경 공해로 인해 산 빛이 곱지 못할 때가 있다. 겨울에 눈이 내려 나뭇가지에 소복이 쌓여 있어도 촬영기간 동안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촬영기회가 주어져 해가 떠서 기온이 오르면 소복이 쌓인 눈이 금방 녹아 없어지고, 바람이 불면 날라 가버리기 때문에 촬영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신속한 동작으로 작업을 마쳐야 한다. 또한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나야 자연이 연출해 주는 그 숭고한 아름다움을 보다 진실하게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풍경사진의 개념과 우리나라와 미국 풍경사진에 대해서 살펴보고, 지리산의 아름다운 풍경과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이해하는 것은 지리산의 아름다운 풍경에 보다 실질적으로 다가서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지리산에 배어있는 본질을 읽어내고, 자아에 내재되어 있는 풍경의 이미지를 새로운 측면에서 나타내고자 했다. 곧 계절에 따라 다양하게 연출되는 장면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표현하고, 본 연구를 통하여 자연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자연친화적인 삶을 탐구하고자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지리산의 모습, 우리의 삶의 터전 그대로의 모습을 영원히 보존하고자 한다.
  Ⅱ 본론

  1. 풍경사진

  고유가의 어려운 시대에 현대사회는 급속도로 변하고, 주5일 근무제가 실시되면서 산을 찾는 사람들이 무척 늘어나고 있다. 산자락에서 웅장한 산을 찾는 사람들, 정상에서 평화로운 세상을 내려다보는 세속의 모습, 산의 품에 안겨 산과 교감을 통해 산의 마음을 이해하고, 웅장하고 따스한 산의 온기를 느끼려는 사람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등산로 입구의 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한다.
 인간의 시각을 자극할 수 있는 다양한 모습들로 연출되어 새로운 풍경으로 인간을 유혹하고 있는 광경들이 철에 따라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러나 기후 변화에 따라 지리산에 펼쳐지는 풍경들은 옛날과는 사뭇 다른 모습들이 많다. 그것은 환경오염이 원인이다. 1982년부터 456만평의 바다를 매립해 불과 10년 만에 여의도 5배 크기의 세계에서 가장 큰 제철소로 발돋움하는 대역사가 이루어진 광양제철소가 생긴 이후로 지리산의 오염은 더했던 것 같다. 그 이후 강추위가 계속되는 겨울에는 산속에 있는 샘은 꽁꽁 얼기 때문에 물을 얻기 위해 쌓인 눈을 녹여 제아무리 정수를  한다 해도 녹여진 눈의 물은 깨끗하지 못하다. 그것뿐인가 아무리 맑은 날씨인데도 시야가 흐려 먼 곳까지 조망이 어려울 때가 흔하다. 환경오염을 초월해서 연중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포착하기란 쉽지 않다.
 김근원(1922~2000)의 ‘산악사진 이론과 실제’ 에서
 “오늘날 산악사진은 탐험을 목적으로 한 산악사진과 맥락을 같이 한다.”
 “탐험이란 서부 개척시대의 탐험대, 프랑스에서는 알프스 몽블랑 탐험대, 그  리고 영국에서는 동아시아 지역과 아프리카 탐험대에 함께 사진가들을 파견  했다. 그렇지만 과거의 탐험사진은 탐험과 개척을 빙자한 타국과 타민족에 대  한 침탈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불행한 사례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탐  험이라기보다는 등산을 통한 우리 국토의 보존과 구명, 학술조사에 목적이 있  었다. ”
 “순수한 탐험이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보다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산악미  를 어떻게 하면 예술적인 감각으로 촬영할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졌고, 또 이미 알려진 산이지만 어떻게 하면 새로운 영상미로 승화시킬 수 있  는가에 시각이 쏠렸다, 그래서 산악사진 본래 목적인 기록을 통한 아름다움의  보존이 아니라 단순히 아름다운 사진을 찍어보자는 회화적 경향으로 가치가  전도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풍경사진의 개념은 ‘자연경관만을 찍은 사진’ 이며 인공적인 조형물이나 시  설을 가급적 배제한 상태에서, 순수한 자연물과 그 변화만이 허용하고, 풍경  사진에 인위적인 요소가 들어가면 자연의 신비감이 감소될 수 있다”.  고    했다.
 풍경에서는 극적이고 칼라적인 그리고 평화스러운 장면에 매력을 느낀다. 그것은 풍경이 우리에게 무한한 창조를 제공하며 새로운 면모를 보여 줄 수 있는 광대한 보고(寶庫)라는 점에서 그렇다. 같은 장소의 풍경일지라도 계절에 따라 변화하며 어느 계절에 그곳을 찾느냐가 중요한 요인이다. 계절마다 특수한 감정을 시사하여 준다. 화사함이나 풍만함, 우울함이나 쓸쓸하고 황량함 등이다. 또한 풍경은 하루 중에서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분위기가 시시각각으로 다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은퇴(1994)한 짐 블레어(1951~    )는 이렇게 말했다.
 “풍경사진은 단순히 아름다운 그림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풍경사진도 어떤    목적을 위해 공헌할 수 있다. 풍경사진의 일은 사진을 보는 사람이 어떤 장소  에 관하여 관심을 갖도록 그를 감동시킬 수 있는 정서를 찾아내고 전달하는  일이다. 예컨대 『위협받는 우리의 유산』에 나오는 이미지들은 미국의 재산  을 보존하는 일에 많은 도움을 준 바 있다. 국립공원이라든가, 동물대피소, 그  리고 우리가 집단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여러 지역들과 같이 말이다”
 김근원의 ‘풍경사진은 탐험보다도 웅장하고 아름다운 산악미를 예술적인 감각으로 표현하고 새로운 영상미로 승화시켜야 한다.’ 는 주장과 민태영․권진희의 ‘계절따라 수시로 변화하는 색채에서 느끼는 정감 표현,’ 블레어의 주장처럼 ‘어떤 목적에 공헌할 수 있는 풍경사진가가 되어야 한다’ 는 데 대하여 적극적으로 공감한다.
 
    1)산수화와 풍경사진

 회화는 선사시대의 암각화(巖刻畵)나 청동기에 나타난 선각화(線刻畵)들을 보면 다분히 풍요와 다산을 기리는 성격을 띠고 있으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회화는 종교적 또는 기록적 성격을 띤 실용적 목적의 그림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감상을 주목적으로 하는 순수한 회화가 왕공귀족(王公貴族)들과 선승(禪僧)들 사이에 널리 유행하여 조선시대까지 크게 꽃피우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문인들과 선승(禪僧)들 사이에 자기 수양을 목적으로 하여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다분히 사의적(寫意的)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풍경사진가의 사상이나 철학 등의 내면세계를 ‘카메라’ 라고 하는 기계를 빌어 표현하려 하는 것을 보면 회화나 사진, 문학 등 모든 예술은 자연이 예술적 모티브가 되어 왔다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문기(文氣)나 서권기(書卷氣)는 천성과 재주 이외에 만권의 책을 읽고 천리행(千里行)을 행함으로써 얻어진다. 사진에서도 같은 말이다. 촬영하기 전 소재를 선택하는 것과 주제와 부제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고 (Thinking), 자기의 사상과 철학등 공통점을 갖는 많은 작품을 감상하고(Looking), 사진은 발로 찍는다는 말이 있듯이 많은 실습(Doing)을 해야 한다. 
 동양이나 서양의 모든 예술가들은 자연에 감동되어 자연을 예찬하고 자연을 동경하고 그리워하면서 자연에 도취되어 살아왔다. 동양인들이 자기의 삶의 터전에서 체험을 재현하려 하는 것이 바로 산수화이다. 자연에 있는 그대로 그것을 객관적 형상을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동양인은 동양인 나름대로 자연에 몰입되고 자연에 융화되어 하나가 되려는 생활 속에서 동양 특유의 사상을 발전시켜 자연의 정기를 화폭에 담으려 했다. 이러한 예술정신을 바탕으로 산수화는 등장했다. 인간은 자연을 통하여 사상과 감정의 의미를 획득하고 심적 혼란을 극복한 평화를 얻는다. 초기의 한국 회화사에 나타난 산수화는 중국산수화의 영향으로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회전반의 사상적 변화와 시대적 필연성에 의해 진경산수가 나타났다. 동양의 산수화와 서양의 풍경화를 살펴볼 때 동양과 서양의 문화관이나 세계관 및 자연관의 차이, 사유형태의 근본적인 차이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결국 풍경이란 인간의 감수성에 대한 문제이며 자연과 대상에 대한 인간의 인식방법을 총칭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옛날 화가들은 회화(繪畫)의 이론을 거치지 않고도 높은 신묘(神妙)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들이 많았다. 불교를 익혀 도를 깨닫고 해탈(解脫) 하여 고승(高僧)이 되는, 무아(無我)→자아(自我)→해탈(解脫)과 같다. 동양화는 이런 면에서 선교적인 사상과 공통적인 면이 있고 아울러 순수한 문인화 속에 고승화 계통이 깊이 작용하고 있다.
 산수화에는 유, 선, 도교적(儒,禪,道敎的)인 철학 이념이 있다. 유교적인 철학 이념이란 곧 공자의 학설을 말한 것으로 일찍이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가 공자에게 묻기를 ‘시경(詩經)에 귀여운 입가의 웃음이여, 맑게 개인 미인의 눈웃음이여, 본바탕(素)이 찬란함이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공자는 대답하기를 ‘그림을 그릴 때는 본바탕(素)이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라는 뜻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또한 송대의 주희는 공자의 회사후소(繪事後素)와 소이위현(素以爲絢)에 대해서 소(素)란 회화의 질이고 현(絢)이란 채색으로서 회화의 장식이라고 했다.  사진의 기법에서도 배경 처리가 주제를 살리는데 큰 역할을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연을 대하되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물보다 산을 좋아하며 또 지혜로운 사람은 동적이고 어진 사람은 정적이다. 산수화는 확실히 자연의 경물(景物)과 많은 관계가 있다. 그리고 산수화는 시(詩), 서(書), 화(畵), 음악(音樂)이 포함된 종합예술이다. 시는 무형의 그림이며 그림은 유형의 시이다.
 고개(顧愷)의 산수화론은 산수화를 형성함에 있어서 산은 뒤의 배경을 등지고 아래로 물속에 비치는 경치는 모두 도작(倒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 예로 ⌈화운대산기(畵雲臺山記)⌋에 산수화는 음영(陰影)과 도영(倒影)의 형식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고개(顧愷)의 산수화에 대한 진보적인 사고방식은 그가 실지로 자연을 관찰하여 얻어진 사실적인 표현으로 산천에 대한 관찰의 경험을 비교적 심각하게 다루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한 폭의 산수화로 대자연의 묘미를 느낄 수 있으려면 산천의 아름다움을 그만큼 채득해야 한다는 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산수화란 수수한 자연을 그대로 실감나게 표현하는 것이라는 사실적인 이론을 가지고 있다. 그는 또 산수화에서 공백문제(空白問題)를 처리할 수 있는 이론을 내세웠는데 즉 ⌈화운대산기(畵雲臺山記)⌋에서 〈범천급수색(凡天及水色) 진용공청관소(盡用空靑寬素)〉라고 하여 모든 하늘과 수색(水色)은 청색 바탕을 하라는 이론이다. 이것은 곧 오늘 날 칼라 시대에 색채를 말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회화의 중심적인 표현은 〈전신사조(傳神寫照)〉와 〈천상묘득(遷想妙得)〉이다. 여기서 신(神)은 물체(物體)의 영감(靈感)으로 전해지는 작가의 정신을 말하고 사조(寫照)란 대조해서 그린다는 뜻이며 천상(遷想)이란 생각을 옮기어 묘미를 얻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서양화법에서 말한 감정이입(感情移入)설과 같다. 
 왕유 등 팔대산인들은 깊은 산속의 산새, 흐르는 물소리, 절벽의 묘미, 단풍의 선경을 벗 삼아 수십 년씩 자연의 신비를 마음속 깊이 스케치하면서 높은 예술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이런 면에서 노, 장자(老,壯者)의 예술정신은 회화 특히 산수화에서 더욱 중요시된다. 또 그들의 예술의 해방정신 이론은 현대 서양의 견해와 같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많은 화가들이 산수화를 그려 회화의 대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산수화의 대가들은 정선과 김홍도 등을 꼽을 수 있다. 안견은 북종화를 수용하여 높은 경지의 산수화를 개척했고, 정선은 남종화와 북종화를 아울러 받아들여 독보적인 조선의 진경산수를 창출했다. 이 두 분들의 화풍이 다르다고 하지만 우리의 산천을 토대로 한 진경산수화도 실경을 바탕으로 하였다.
 풍경사진의 역사는 사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니세포르 니에프스( Nicéphore Niépce 1765-1833)는 생-루-드-바렌 소재 그라 저택의 창에서 8시간이나 노출을 주어 촬영한 사진이 전해진다. 1826년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은 헬무트 거른사임이 1952년에 찾아냈으며 니에프스는 1816년 이후 풍경을 수십 차례 촬영해서 1826년과 27년에 여러 점을 성공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까지 로버트 아담스(Robert Adams 1937~ )나 안셀 아담스(Ansel Adams 1902~1984) 등 많은 사진가들이 풍경사진을 가장 많이 촬영해 왔다.
 우리 나라에서도 정약용 등 실학자들이 중국에서 사진술을 배워와 시간과 공간, 새로운 영상미로 승화시켜 자연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자하는 개성이 잘 드러나 있다. 자연의 장엄함과 힘찬 모습을 주제로 한 작품과 매우 추상화된 공간 속에 작가 자신의 내면적 세계를 반영시킨 작품, 그리고 주관적 심상을 표현하는 심상풍경(心象風景)사진 등이 있다. 이렇게 자연을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 점으로 보아 한국이나 중국 화가들의 시각이 풍경사진가의 시각과 일치한다고 하겠다.

    2)한국의 풍경사진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이규원, 최한기(崔漢綺 1803~1875) 등 실학자들이 사진의 원리를 독자적으로 연구하였다. 정약용이 카메라 옵스쿠라(camera obscura)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 은 카메라의 구조와 원리를 정확히 그 이름에 반영하고 있었다.
  1890년 무렵 황철(1864~1930)은 금강산 촬영을 했으나 그가 말년을 보냈던 일본의 한 지방 자료관에 금강산 사진이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1920년대 민충식, 박필호, 신봉린 등은 금강산 촬영을 했으며, 1921년 동아일보 민태원 기자는 함경남도 도청에서 조직한 백두산 탐험대와 함께 백두산 정상에 올라 천지를 촬영해서 8월 29일자 사회면에 사진을 게재했다.                   
 1926년 경성사진사협회가 구성되어 예술사진이 시작되었고, 신낙균(申樂均)에 의해 회화의 영향을 받은 예술사진이 주창되었다. 고무인화법· 브롬오일 등의 인화법을 사용하여 회화적 분위기의 영상을 창출해 낸 예술사진은 사진의 가치를 회화와 동일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다양한 소재를 활용하여 아름다운 화면을 구성하려는 예술사진이 시도되었는데 1928년 정해창(鄭海昌 1907~ 1968)의 예술사진전람회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1882년 광산업 집안의 황철은 중국 상하이에 들어가 4개월 동안 사진술을 습득하고 독일카메라를 들여와 1883년 사진 활동을 시작하여 창덕궁과 경복궁 그리고 덕수궁 등 궁궐은 일반인들이 쉽게 가보거나 구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구중궁궐(九重宮闕)이란 말처럼 일반인들은 물론 어느 누구도 함부로 들어가 볼 수 없는 궐내의 요소요소를 카메라에 담았다. 경치가 아름다운 비원, 경회루, 향원정 그리고 근정전, 인정전 등 중요 건물, 궁궐의 문루와 궁궐의 주위를 조망할 수 있는 대사(臺榭), 궁궐 주위의 풍경들이 카메라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 서울 시내의 동대문과 남대문, 동소문과 광희문 등 성문과 거리, 여러 관아와 육조, 한강변의 경치까지도 그의 카메라의 피사체가 되었다. 사진의 특질을 잘 나타낼 수 있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당시의 지도층 인사들에게 이해를 얻어내려고 시작했던 그의 사진 활동은 시일이 지나면서 방대한 작업이 되었다. 황철은 어렵게 촬영한 사진들을 들고 다니면서 개화시대의 사진의 역할에 대해 당시의 주요 인사들을 설득하는 한편, 외국인 여행가들과 외교관들에게는 한국을 소개하는 데 필요한 사진을 제공하기도 했다.
 유유자적한 동양화풍의 사진가 정해창(鄭海昌 1907~1968)은
 “다년간 사진예술을 연구하여 영리를 떠나서 예술사진을 제작하던 정해창씨  는 그동안 박힌 자신 있는 오십여 점을 가지고 리제창(李濟昶) 씨 외 여러    우인들의 후원으로 작품 전람회를 오는 29일부터 시내 광화문빌딩에서 개최  한다는 데 조선사람으로 예술사진전람회를 열기는 이번이 처음이요 작품 중  에도 훌륭한 풍경화가 많다더라.”
 정해창의 예술사진 개인전람회(1928. 03. 29)는 개막 이전부터 신문들이 보도하면서 일반인들 사이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지금 광화문 네거리 부근에 있던 광화문 2층 화랑에서 열린 사진전은 오늘날의 필름도 아닌 무겁고 감광도가 극히 낮은 유리 원판으로 작업한 4절판 크기의 사진 40여점과 전지 크기로 만든 10여 점 등 모두 5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전시된 사진들에는 인물 사진과 정물사진도 있었지만 풍경을 소재로 한 시골, 강변, 산천, 하늘의 구름 등 사진들이 더 많아 보는 사람들을 감탄케 했다. 이 작품들은 다양한 소재를 어느 것에도 얽매임 없이 자유분방하게 작품화했다. 지금까지 일반적인 사진적 경험이나 눈여겨보아 왔던 사진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이런 점에서 신선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그가 작품을 위해 선택했던 피사체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이한 소재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평범한 장면들을 적절하게 선택하고 카메라 앵글에 따라 새롭게 재발견하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독일어를 전공한 그가 금석학(金石學)에 심취했고, 서예전, 동양미술사 강의, 서양화와 사진화학을 연구했고, 4회 전시회에서는 사진의 내용이나 소재들은 지금까지 발표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동양화와 같은 방식으로 작품을 장정해서 전시했다. 
 우리나라에 외국문화가 마구 쏟아져 들어올 때 정해창은 사진을 통해서 우리의 문화에 맞는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의 사진에서 느낌은 아주 자연스럽고 친숙하였으며, 화려한 색채가 없어도 강한 미적 충격을 전해주었다. 그의 사진들은 한국적인 미의 표현이 단순한 소재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진가의 미에 대한 의식과 이를 현실화시키는 능력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사라진 전통 미의식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깊은 호소력을 발휘한다. 정해창의 사진은 한마디로 ‘소박하고 평온한 한국미의 형상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사진을 통해서 자신의 미적 감수성을 시각화했으며, 그의 미적 감수성은 어느 외래문화에도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문화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순수한 한국미의 원형이 그의 사진세계를 이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카메라 뒤에는 항상 사진가가 서 있으며, 사진가의 의식은 자신의 환경과 역사적 경과를 통해 규정되고, 그 의식이 바로 사진으로 귀결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산악사진은 리얼리즘 개척 사진가 임석제(林奭濟1918~1994)가 1930년대 와세다대학에서 수업 중 사진 활동을 시작하여 부두의 노동자와 탄광 광부 등 촬영에 몰두하였으나 1950년대 폐가 나빠 산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산악사진 활동으로 전환하여 한국 사악사진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리고  김근원(1922~2000), 한영수(韓榮洙1933~19990) 등이 산악사진 촬영에 전염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고, 백두산,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등 우리나라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작화하고, 또는 투철한 애향심으로 자기 고장의 산에 올라 촬영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여 산악사진의 커다란 길을 열었다. 
 
    3)미국의 풍경사진

  미국의 풍경사진은 사진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1864~1946), 폴 스트랜드(Paul Strand 1890-1976), 에드워드 웨스턴(Edward Weston 1886~1958),  안셀 아담스(Ansel Adams 1902~1984), 마이너 화이트(Minor White 1908~1976), 폴 카포니그로(Paul Caponigro 1932∼  ) 등이 하나의 미국 사진의 길을 만들었다. 그 중 안셀 아담스(Ansel Adams)의 작품집 ‘The American Wilderness’와 ‘YOSEMITE AND THE HIGH SIERRA’작품집에서 자연의 웅장함, 신비로움, 감미로움, 큰 스케일 등의 진면목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는 미국의 회화 운동의 중심에서 활발한 조직자 노릇을 하였다. 그는 1902년 ‘사진 분리파(Photo Secessio :낡은 사진의 틀에서 벗어나 새롭게 나선 운동)’ 그룹을 조직하여 이듬해 사진 전문지‘카메라 워크(Camera Work)’ 지에 회원들 사진을 소개하였고 1905년 뉴욕 5번가의 소화랑인 ‘291 화랑’을 만들어  ‘사진 분리파’ 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1910년 ‘즉물사진(卽物寫眞 :사진의 기록성을 살려 대상을 즉물적으로 재현하는 사진)’이 시도되어 에드워드 웨스턴(Edward Weston), 안셀 아담스(Ansel Adams), 마이너 화이트(Minor White) 등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마이너 화이트(Minor White)의 작품에서는 화면과 뉘앙스(nuance)가 매우 화려하고 강렬하며 풍부해서, 마치 갑작스럽게 비물질적인 것으로 전향하는 듯이 보이며, 나무 문짝이나 지저분한 바위덩이가 마치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들은 명상 성체(聖體), 성배(聖杯)의 이미지들이며, 모든 소재를 통해서 언제나 신성(神性)의 모습을 환기시킨다. 또 개성적인 이론 때문이라기보다는 시적 형상과 정신적 단련으로써 내면적인 사진행위를 그 스스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는 풍경사진가 폴 카포니그로, 초현실파 제리 율스만, 마이클 호프만,  피터 버넬, 그리고 영국인 에이먼드 무어 등이 있다.
 폴 카포니그로(Paul Capponigro 1932 ~ )는 스승의 이론가적 모호함에서 벗어난 그는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물방울에서부터 암벽의 힘찬 볼륨에 이르기까지, 음악적이며 미묘하고 순수한 자연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는 사물의 소박한 아름다움 앞에서 교묘히 자신을 감추고, 거기에서 모차르트적인 화음을 끌어낸다.
 에드워드 웨스턴(Edward Weston 1886~1958)이나 안셀 아담스(Ansel Adams)의 장엄한 건강성을 이어받은 미국의 전통적 자연 사진은 마이너 화이트의 강렬한 신비주의를 재현하지는 못했어도, 웨스턴의 사진집 ‘포인트 로보스에서, 나의 카메라’(1950)가 보여주었던 신비감에 깊이 젖어 있었다.
 윌리엄 클리프트는 풍경과 질서정연한 건축사진, 그리고 회색조의 과학적 아름다움을 통해서 안셀 아담스의 정통성을 계승, 발전시켰다.
 탁월한 형상 묘사로 잘 알려진 웨스턴이 속해 있던 미국의 사진가들은 좀 색다른 경우이다. 새로운 사진 속에서 그들은 스티클리츠가 ‘이퀴벌런트’ 라고 불렀던 직관(直觀)의 시각적 반향을 자연스럽게 구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셀 아담스는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모든 작업데이터의 과학적 검증을 통해서 그는 물체와 빛의 극도의 미묘한 변화를 표현할 수 있는 숙련된 경지에 다다랐다. 자연의 애호가인 아담스는 그의 사진에서, 시적인 장엄하고 고결한 자신의 사진적 언어를 가지고, 가장 아름답게 미국의 풍경을 찬미했다.
 웨스턴의 생각에 따르면, 사진가는 셔터를 누르기 전에 이미 마음속에 완전한 최종적인 이미지를 그리고 있어야 한다. 마치 각각의 음화가 긴 광학적 행렬의 총체인 것처럼 보이도록, 사진의 선예도(sharpness)를 높이기 위해 그는 세부 묘사가 잘되는 렌즈의 조리개를 사용했다. 1932년 그를 따르는 젊은 사진가들이 모임을 결성하면서 채택한 이름 ‘F64’는 그래서 상당히 의미 있는 것이었다. 이는 기계적으로 가능한 렌즈의 가장 적은 수치로서 최대의 선예도를 만들 수 있는 조리개의 크기이다. 이들 사진가들에게 세계는 광활한 활동무대였다. 대상에 어떤 서열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늘과 풍경에서부터 지구의 지질구조, 특별한 빛의 작용도 없는 덧없는 순간, 풀잎에 맺힌 영롱한 빛 그리고 그것들의 성장과정의 리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보고 기록할 가치가 있었다. 그들은 마치 전에는 사물을 결코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신선한 눈으로 모든 대상을 바라보았다. 가장 의미 없는 현실의 단면조차도 끊임없는 탐구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단순한 사물도 너무 오랫동안 방치하고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위치를 차지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이 만든 무한히 매력적인 사진들은 그들의 세세한 탐구정신에 대한 보답이었다. 
 안셀 아담스(Ansel Adams 1902~1984)는 예술에 대해서 천재적인 소질을 가졌다. 14세 때 사진촬영을 했으며 1920년에는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그러나 과도한 음악활동으로 건강이 나빠져 요세미티에서 사진관을 하고 있는 백부집에서 요양 중 다시 사진을 시작해서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계보를 이었고, 풍경과 좋은 인화 적절한 네가티브를 얻기 위해 존 시스템(Zone system)을 완성했다. 1962년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미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 이듬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회고전을 가졌다. 그리고 1927년 25살 때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경력을 추구할 것인지, 프로 사진가가 될 것인지 고민했을 때 뉴욕에 사진가로서 4명의 선망의 대상자 빅 S가 있었다. 스티글리츠 알프레드 Stieglitz Alfred(1864~1946), 스타이켄 에드워드 Steichen Edward(1879~1973), 쉴러 찰스 Sheeler Charles(1883~1965), 스트랜드 폴 Strand Paul(1890~1976)이다. 캘리포니아에는 에드웨드 웨스턴 Edward Weston(1886~1958), 도로시아 랭 Dorothea Lange(1895~1965), 이모겐 커닝햄 Imogen Cunningham(1883~1976) 모두 아담스가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돈벌이가 충분하지 못한 모델사진이나 인물사진으로 근근이 연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스는 사진을 선택했다. 아니, 사진이 아니라 요세미티(Yosemite)를 선택했던 것이다. 아담스는 요세미티를 돌아보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위대한 요세미티 사진가 왓킨스(Watkins 1829~1916)와 위드(Weed ), 뮤브리지(Muybridge)는 그들의 일을 아담스가 시작하기 50년 전에 했다. 19세기 마지막까지  그들은 진정으로 미국 서부의 풍경을 작품화했다. 그들 사진 진수는 인간과 무관함이었다. 알버트 비어스탓(Albert Bierstadt)같은 그룹의 관중들을 즐겁게 하는 화가조차도 경외(敬畏)한 광경을 문명과 연관 짓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빛의 대표적 연출법 안에 장면을 흡수하는 것은 가능했다. 하지만 단순한 사실과 거기 있는 빛에 젖어있는 화가에게 문제는 더 심각했다. 그리고 최고의 사진은 그들이 찍은 사진에 있듯 틀에 젖은 감정에서 벗어나 추상적인 예술적 해법을 제공했다.
 아담스와 왓킨스는 두 세대 차가 나기 때문에 달랐다. 왓킨스의 주제는 지질학적이고, 아담스는 기후적 변화와 날씨였다. 두 시대 사이에 감광속도 변화와 팬크로매틱 컬러(panchromatic color, 전정색성 컬러) 반응의 건판 필름이 있었고 이런 발전은 새로운 사진의 가능성이었다. 이러한 기술적 이유로 왓킨스는 아담스의 사진을 찍지 못했다.
 30대 최고의 걸작은 심도가 깊고 매우 개성적이다. 아담스는 ‘대부분은 세부적 묘사이고 자연의 세목 그리고 단 하나의 산과 계곡 위의 빛의 감정과 기후적 변화였다.’ 라고 했다. 그러나 40대의 아담스는 넓은 영웅적 견해를 만들기 시작했다. 서정적 감성은 점점 서사체로 바뀌었다. 아담스의 작품을 바꾸는데 역할을 한 다른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이동수단이었다. 30대의 작품은 그가 걸어서 여행할 때 수행된 것이고 그 후에는 스테이션 웨건(station wagon :접거나 뗄 수 있는 좌석이 있고 뒷문으로 짐을 실을 수 있는 자동차)으로 여행했다.
 좋은 사진은 자동차 옆에서 촬영한 것보다 촬영하기 어려운 동기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 예술가는 어려운 문제를 시도함으로써 특별점수를 얻는다는 생각에 대한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차라리 다음 촬영에 대해 에너지를 저장하는 편이 낫다. 아주 힘들게 이동하여 꾸불꾸불하고 눅눅한 늪지와 가파른 언덕으로 헤매어도 사진적 시각으로 볼 때 평범한 풍경으로 이끌 때가 많다. 가장 힘든 작업이 적합한 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좋은 장소와 나쁜 장소는 각도에 따라 다르다. 최고의 일반적인 법칙은 좋은 빛이다. 그래서 이슈(issue)는 스피드(speed)에 달려있다. 시간당 40마일로 달릴 때 아담스는 ‘문라이즈(Moonrise)’나 허나데즈(Hernadez)‘와 같은 좋은 작품의 동기가 되는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화려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마지막 햇빛이 교회를 비칠 때 장비를 풀고 설치하는 동안 빛을 측정할 틈도 없는 광적인 서두름 등등. 그것은 축구경기에서 골인을 보는 것과 같이 그의 순간의 포착에 감탄한다.
 아담스는 초인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본다. 위대한 공간, 폭포, 비범한 산, 그리고 거대한 힘에 대한 두려움 등 자연의 숭고함은 종종 광대함과 연관된다. 지질학자 클래런스 킹(Clarence King 1842~1901)이 화려한 초목의 요세미티를 봄에 봤을 때 ‘지질학적 공포’를 마법의 커튼에 의해 보지 못했다는 말은 흥미롭다.
  아담스는 산의 정상에서 항상 행복감을 느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복잡한 세상을 원치 않았다. 풍경사진은 도덕적이지 못한 시각이나 혁신적인 시각이 아니라 고전적이고 명예로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전통적인 풍경사진은 인간의 어려움과 종종 위험한 지구상의 삶과 높은 사원의 파괴 그리고 계곡, 목동의 오두막, 소와 양의 흔적, 목초지에 수놓아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담스가 찍은 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것이 없다.
  그의 초창기 사진은 약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50대 후에 아담스가 약간의 명성 등 물질적인 것을 얻었을 때 그는 조금씩 사랑스럽고 믿음직스러운 모습으로 변해갔다. 50대에 아담스의 새로운 사진은 급격히 줄었고 60대에는 드문드문 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사진가로서의 삶은 주로 그의 네가티브의 재인쇄와 재해석이었다.
 안셀 아담스가 죽은지 2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풍경사진계에서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담아내기 어려운 어제의 빛과 오늘의 빛이 다른 것을 그는 교과서적으로 치밀하게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헤르단데즈 월출’ 전경에 반짝이는 십자가와 ‘시에라네바다 일출’  빛속에 풀을 뜯는 망아지의 모습에서 기본에 충실한 그의 마음을 생각하면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표현하고 싶었던 장엄한 대비의 미적 경험에 감동을 생생하게 느낀다.
 1976년에 아담스(Ansel Adams)는 Little Broun and Compony를 그의 책, 포스터, 카렌다 등의 유일한 출판업체로 선택했다. 동시에 그는 지속적인 출판물, 작품의 질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예술적인 면과 환경 예술의 면에서 The Ansel Adams Publishing Rights Trust를 설립했다. 안셀 아담스는 작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인쇄의 질이라고 한다. 작품을 최대한으로 재생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공인된 출판물은 Little Broun에 의해 출판된 작품만이 진정한 대표작이라고 했다. 

  2. 지리산 풍경의 이미지(image)

    1)지리산의 배경

 지리산은 계절에 따라 신비한 모습으로 가끔 변화된다. 기온은 한여름이라 할지라도 계곡물에 들어가면 발이 시리고, 한겨울에는 영하 20~30도 이하까지 내려갈 때가 많아서, 자동카메라 기능이 멈춘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고, 기계식 카메라라 할지라도 작동이 안 될 때가 많다.
 지리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 코스가 있다. 비포장 길 시대에 눈이 오면 2박 3일 동안 걸어 가야할 백무동에서 천왕봉 코스가 요즈음은 5~6시간이면 충분하다. 반야봉 코스는 4~5시간 소요된다. 그 중 본 연구를 하기 위해 자주 찾는 코스는 중봉, 제석봉, 천왕봉, 명선봉, 반야봉, 만복대 코스와 뱀사골, 달궁 코스다. 중봉에서 본 천왕봉은 산신령의 머리와 같이 보이고 제석봉은 산신령의 전체의 모습과 흡사하게 보여 그야말로 장엄하고 그 위용이 넘친다. 거기에서 보는 반야봉은 마치 예쁜 여자 엉덩이 같이 보여 많은 사진가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지리산 중봉은 아침저녁 빛이 부드러울 때 촬영의 명소로 꼽히기도 한다. 반대로 반야봉에 올라서면 천왕봉은 동쪽이며 남쪽은 불부잔등과 대성골, 피아골, 왕시리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노고단과 무등산, 만복대가 장엄하고 우람하게 장관을 이룬다.
 달궁이나 뱀사골 등 지리산 계곡은 자연이 만든 작품이다. 억겁의 세월, 계곡에 흐르는 물이 기암괴석을 갈고 다듬어 소(沼)와 폭포를 줄줄이 만들고 찬란한 물보라 속에 아름다운 꽃과 신록까지 가꾸어 놓았다. 
 천지(天地)가 있고, 해와 달과 별과 흑백이 있듯이 비교와 대조, 비유 등 지리산이 가지고 있는 자연과 빛 그리고 기후와 생물과 무생물이 조화가 이루어지는 순간 비로소 한 폭의 한국화, 곧 작품을 탄생시킨다. 이러한 조건과 조화가 잘 이루어지려면 색채와 구도, 색채의 배분과 배치, 색채와 형태, 명암의 가벼움과 무거움 등 모든 사물이 조화를 이루어내야 작업의 좋은 결실을 맺는다. 자연을 소재로 한 풍경은 하느님이 연출을 해주어야 좋은 작품이 되기도 하지만 첫째 사진가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시지각이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아무리 좋은 장면이 있다 해도 사진가가 발견하지 못하면 좋은 작품을 창작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1)역사적 ‧ 문화적 배경

 조선시대 지리산에 올라 기행문을 남겼던 유학자들로는 1463년에 이륙(李陸1438~1498)을 비롯해 1472년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수행원 40여명을 이끌고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유두류록(遊頭流錄)’ 기행문을 남겼고, 1487년 남효온(南孝溫 1454~1492), 1489년 김일손(金馹孫 1464~1498), 1558년 조식(曺植 1501~1572), 1586년 양대박(梁大樸 1554~1592), 1643년 박장원(朴長遠 1612~1671), 1724년 정식(鄭栻 1683~1746), 1752년 박내오(朴來吾 1713~1785), 1783년 이덕무(李德懋 1741~1793), 1790년 이동항(李東沆 1736~1804), 1879년 송병선(宋秉詵 1836~1905) 등이 지리산에 올라 ‘선비문화’를 꽃피웠다. 
 지리산 주능선 길만 25km 정도가 되며, 덕두산에서 대원사 입구까지는 80여km 종주길이 된다. 4박 5일 정도 밟아야 완전 종주를 하기 때문에 그 웅장하고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예찬하지 않을 수 없다.
 왕이 되려던 이성계가 여기서 치성을 올렸으나 그 소지가 타오르지 않아 불복산이라거나 반역산으로 불린 전력탓이었을까, 왕조시대에는 의적을, 분단시대에는 빨치산에게 오랜 근거지를 제공했다하여 적구산(赤拘山)이라 불려지기도 했다.
 또한 가야의 임금이 음악하는 명인을 찾아 정치를 물으려 하자 그가 숨은 곳이 지리산이었으며, 신라시대의 기인 고운 최치원이 어느 날 홀연히 초월의 세계로 사라진 곳도 지리산 기슭이었기에 고운동이라는 지명을 남겨놓았다. 중국에서 선종(禪宗)이 처음 전래되었을 때도 실상사를 중심으로 지리산은 그 본거지로 자리 잡았고, 동학을 일으킨 최재우가 경주에서 박해를 받자 남원의 지리산 자락으로 옮겨와 혁명 주체를 키웠다. 그뿐인가, 구한말 김일부와 강증산의 사상적 뿌리는 지리산에 깊이 박혀 있었다.
 지리산 벽소령은 달밤에 찾아갈 때 제 맛이 난다. 산봉우리들이 첩첩으로 겹쳐져 그려지고 골짜기들이 유령처럼 아른거리는 달밤에 벽소령의 아름다움은 장관을 이룬다.
 세석평전은 그 고원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감당할 길이 없어 자살해 버렸다는 시인이 있다. 여름이 가까워져야 이 고원에는 비로소 봄이 열린다. 지리산의 봄은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고, 오히려 화신(花神)과 더불어 그 꽃소식을 묻는 사람들과도 더불어 땅에서부터 올라온다고 한다. 그 봄에 붉은 개벽 세상을 성취하는 세석철쭉의 찬란함은 젊은 빨치산들이 여기서 맞이했던 장렬한 최후와도 어울린다.
 잔돌평전 끝에는 촛대봉과 연하봉이 솟아있다. 고원지대에 뾰쪽하게 돋아있는 이 봉우리는 종종 어둡고 무거운 비구름에 감싸인다. 상봉이 가까워졌다는 증거다. 업보와도 통하는 역사의 어둠을 온몸으로 삼켜 제물이 된 구상나무들의 잔해가 그곳에 남아있다. 지리산 상봉의 혈맥에 꽂힌 침 같은 그 구상나무의 주검은 거의가 식민시대와 분단시대를 점철한 방화와 전화의 슬픈 잔재다. 제석단과 장터목을 지나면 온통 바위와 무장한 천왕봉의 서쪽 어깨 위로 올라서게 된다. 천왕봉은 갑주 두른 무사처럼 견고하다. 그 견고한 지리산 상상봉에 해 돋는 광경은 삼대에 걸쳐 덕을 쌓은 사람만이 볼 수 있다는 말이 전해진다. 선조에게 그런 덕이 있어 중봉 쪽으로 오색찬란한 햇살이 떠올라 산협 바다 속에 지리산이 개산(開山)하는 아침을 맞게 된다면 그 장엄한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레저시대를 맞아 지리산에는 주능선의 서쪽 끄트머리에 관통하는 관광도로가 뚫렸고 또 수자원공사에서 댐 공사가 한창이다. 그런 개발의 손길에 대한 자기 방어로서 지리산은 뱀사골, 피아골과 같은 깊은 골짜기에 산적이나 빨치산이 아래 세상을 향해 품었던 적의와 같은 한을 스스로 키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지리산을 왜 찾아가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을까 '산이 거기 있기에'라 답했던 영국의 말로리의 선문답을 지리산에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 지리산은 결코 ‘거기’에 있지 않다. 우리 모두의 오랜 삶의 터로서 이제 우리 ‘안’에 있었고 지금도 그 안에 있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 속에 삼신산(三神山) 중 하나였으며 일명 방장산(方丈山)이라 일컬어져왔다. 지리산은 또한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르렀다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고, 간혹 남해 바다에 이르기 전 잠시 멈추었다 해서 두류산(頭留山)으로 적기도 한다.
 ‘ 智異山’이란 말의 어원은 대개 불교에 근거한다고 보고 있다.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지(智)자와 리(利)자를 따와 ‘智利山’이 되었는데 문수보살은 중생을 제도(濟度)하기 위하여 갖가지 다른 몸으로 나타나기 때문에‘지혜(智慧)로운 이인(異人)이 많이 계시는 산(山)’이란 뜻으로 ‘智異山’이 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지리산의 최초의 기록은 최치원이 887년에 쓴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 智理山 ’으로 되어 있으며, 일연의 <삼국유사> 에서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 智異山 ’으로 나와 있다.
  지리산은 넓고 깊은 전설의 바다를 간직하고 있다. ①종석대와 관음대-차일봉 전설, ②달궁전설, ③‘성(性)’의 축제 벌어지던 종녀촌 전설, ④뱀사골 전설, ⑤선비샘 전설, ⑥지리산의 여신 마야고의 전설, ⑦지리산녀 전설, ⑧황호랑이 막터 전설, ⑨세석평전 철쭉꽃 전설, ⑩둥구리 전설 등이 있다.
  세적평전 철쭉꽃 전설은 옛날에 ‘호야’와 ‘연진’이라는 부부가 슬하에 자녀가 없이 지리산 대성계곡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없는 사이 근처에 살고 있는 곰이 연진을 찾아와 말하기를 세석평전에는 아들, 딸을 낳을 수 있는 음양수라는 신비의 샘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연진은 기뻐하며 남편과 상의 없이 음양수 샘터로 달려가 기적의 물을 실컷 마셨다. 그런데 평소 곰과 사이가 좋지 못한 호랑이가 곰과 연진이 주고받던 이야기를 엿듣고 이를 그대로 지리산 산신령께 고해 바쳤다. 산신령은 대노하여 음양수의 신비를 인간에게 발설한 곰을 토굴 속에 가두고 호랑이는 그 공으로 백수의 왕이 되게 했다. 또 음양수를 마신 연진에게도 무거운 벌을 내려 잔돌평전의 돌밭에서 평생토록 혼자서 철쭉을 가꾸게 했다. 그날부터 연진은 스스로의 불행한 운명을 저주하며 슬픔에 젖어 세석평전에서 날마다 눈물을 흘렸다. 닳아터진 다섯 손가락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꽃밭에 뿌리며 가꾼 철쭉은 무럭무럭 자라서 아름다운 꽃이 피고 졌다. 연진의 슬픈 넋이 스며있는 세석 철쭉은 그래서 꽃잎마다 색깔도 붉다고 한다. 또한 연진은 밤마다 촛대봉 정상에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 산신령을 향해 죄를 빌다가 그대로 돌이 되었으며, 촛대봉에 앉은 바위는 바로 가련한 연진의 모습이 굳어진 것이라 한다.


      (2)생태적 특징

  지리산은 태백산맥이 서남으로 갈라지면서 소백산맥을 이루고 추풍령에서 일어섰다가 다시 한려수도로 흘러나가는 중턱에 굽이치며 우뚝 솟은 천하의 웅산이다. 남한 제2의 고봉 천왕봉으로부터 서쪽의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에만도 반야봉, 제석봉 등 해발 1,000m가 넘는 고봉준령이 40여개나 줄지어 버티고 있어 웅산 중의 웅산으로 꼽힌다.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에 걸쳐 있는 지리산은 신라 5악의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 해서 지리산이라 불려 왔다고도 한다.
 지리산은 1억4천2백7십 만평으로 1967년에 국립공원 1호로 지정했다. 지리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보존된 원시림과 야생동물의 보고로써 신비롭고 아름다운 산이다.
 지리산은 해안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내륙에 위치하고 산세가 매우 높고 험해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기온의 일교차와 한서(寒暑)의 차이가 심한 편이다. 마을 근처의 산록(山麓)이 30˚C를 웃돌 때 산정은 20˚C 이내에 머물러 표고 차에 따라 평균 15˚C 안팎의 기온차를 나타낸다. 천왕봉의 최고 기온은 25˚C, 최저 기온은 영하 30˚C 까지도 기록했다는데 겨울철 차가운 북서풍에 실려 온 추위는 실제 체감 온도를 훨씬 떨어뜨린다.
 지리산의 연평균 강우량은 1,200mm 이상이며 여름철에 연강우량의 60% 이상이 집중되어 계곡에서 급류에 의한 조난 사고도 빈번히 일어난다. 특히 지난 1998년 7월 31일 밤 자정께 지리산 전역에 걸쳐 불과 서너 시간동안 200mm가 넘는 집중적인 폭우가 쏟아져 1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실로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기록적인 폭우였는데 산악지형에서 이런 폭우가 내렸을 때 계곡은 마치 해일이 덮친 것 같았다는 것이다. 지리산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기상이 수시로 급변하는 전형적인 산악 날씨의 특징을 보여주므로 항상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겨울철에는 강설량이 많은 칠선계곡과 한신계곡은 겨우내 1m가 넘는 만년설이 쌓여 이듬해 5월경에야 녹는다.
 풍향은 대체로 우리나라 여느 지역처럼 여름철에는 남풍과 남동풍이, 겨울철에는 북서풍과 북풍이 많이 분다. 주변 산록지대는 산이 가로막아주어 풍속이 연평균 초속 1~2m로 미약한 편이지만 산정이나 능선에서는 특히 뿌리가 약한 거목 구상나무 등을 뿌리째 뽑아낼 정도로 강풍이 몰아치기도 한다.
 지리산의 소산(所産)식물은 1,526종으로 우리나라 전체의 소산식물 4,600여종의 30%에 해당된다. 지리산은 식생기후대상 수평적으로는 난대림에서부터 온대중부림까지, 수직적으로는 한대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식생이 분포하고 있다. 해발 1,000m 이하의 계곡부에는 졸참나무, 고로쇠나무, 층층나무, 산벚나무, 물푸레나무, 들메나무 등 낙엽활엽수군집이 많이 분포하며, 능선과 사면에는 신갈나무, 서어나무, 굴참나무, 노각나무, 소나무군집이 주로 자생한다. 해발 1,000m 이상의 지역에는 구상나무, 가문비나무, 주목, 전나무, 잣나무 등 침엽수군집과 신갈나무, 사스래나무 등 낙엽활엽수군집이 분포하고 있다. 노고단, 세석평전과 같은 아고산대에는 히어리(법정보호종) 구상나무군집을 비롯해 철쭉꽃, 털진달래, 병꽃나무 등 관목군집과 호오리새, 산오이풀, 처녀치마, 동자꽃, 박새, 동의나물 등 다양한 야생화가 아름다운 식생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지리산에 자생하는 법정보호식물로는 고란초, 천마, 기생꽃, 산작약, 히어리, 솜다리 등 6종류이며, 천연기념물로는 화엄사 올벚나무(제38호), 와운 천년송(제423호)이 있다.
 지리산의 새순은 4월 하순 시작해서 6월 중순 쯤에 푸른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첫얼음은 9월 하순 단풍과 함께 한다.
 지리산만큼은 제아무리 뛰어난 등산가라 하더라도 등산이 아니라 ‘입산’의 참된 체험이 이뤄져야 지리산을 이해할 수 있다. 계절에 따라, 기후 변화에 따라, 빛에 따라 지리산의 모습은 수시로 달라진다. 또한 환경 변화에 따라 지리산 천왕봉(해발1915m) 다음으로 높은 중봉(해발1875m)과 일출봉 좌우가 거대한 산사태가 일어나 무너져 가고 있으며, 최고봉 천왕봉 하단 등에도 산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토록 웅장하고 아름다운 지리산이 더 이상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본래 지리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내고자 했다.

  3. 작품의 전개와 분석

    1)작품의 전개

 빛의 처리에 대해서 네그르(Negre Charles)는 빛의 표현효과를 향상시키기 위해 음화에 짜임새 있는 수정을 가했다. 그는 빛의 효과가 사물의 형태를 어떻게 보이도록 조정하는 가를 보여준 콘스터블(Constable)부터 빛의 찬란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이것의 존재를 자기 작업의 기본원리로 삼았던 모네(Monet)에 이르기까지, 빛의 문제로 고심한 당대의 화가들이 가졌던 관심을 자신도 갖고 있었음을 이런 방식으로 증명해보였다. 사진은 빛으로 직접 그림을 그리는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했다.
 지리산은 산상(山上)에 대피소가 8군데 있기 때문에 사진가들이 산정 대피소를 이용하여 작업 할 수 있다. 그래서 장기 산행을 하며 촬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격년마다 대대적으로 자료를 모으고 있기 때문에 지리산에 대한 자료가 많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기후에 따라 수시로 변화되어가는 자연의 참 모습, 그리고 빛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을 가까이서 접근하여 식물의 생태 변화에 초점을 맞춰 계절에 따라 바뀌어가는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했다.
  마에다 신죠우(前田眞三)는 사진술과  haiku(일본의 전통 短詩)는 같은 근원을 갖고 있으며, 풍경사진에서 더욱 깊이 느낀다. 그것은 마치 모든 사진이 단 하나의 haiku 같고, 완전하고 본질적인 예술 작업이다. haiku의 세계에서 항상 ‘스케칭’을 주제로 잘 언급하고 창조에서 기본적 이론이다. 스케칭의 목적은 세밀히 조사하고 우리가 그것의 참된 자연을 꿰뚫기까지 주제를 관찰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할 때 진실성이 사실성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외부의 형태 껍질을 깨고 물질 본질을 꿰뚫었을 때 알게 된다. 이를 위해 사람들은 매우 긴 정신적 시도를 겪어야 하며 주제를 찾기 위해 철저한 관찰을 해야 경험을 통해 한 편의 haiku 시를 창작할 수 있다. 자연관찰에 대한 예리한 시각의 날카로움을 느끼며 동시에 그가 찾아낸 발견이 거기에서 포착한 사물의 깊은 고동(鼓動)을 느낄 수 있다. 작품 속에서 그의 민감성의 풍부함과 예술가적 정열을 느낄 수 있다. 곧 실체성은 사진가의 마음이고 마침내 눈은 흥분과 놀라움이 우리에게 드러난 진실인 것이다.
 안셀 아담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존하려는 입장에서 서부 여러 곳의 풍경을 촬영하고 서부풍의 촬영방법을 알린 사람이다. 그는 사진의 계조를 음악적 시스템으로 생각하고 음악의 계조와 사진의 계조를 기술적으로 결합시켜 독자적인 시스템을 고안했다. 프린트에서도 명수였던 그는 '네가는 악보이고, 프린팅은 연주이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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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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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훈/仁 峰(인봉)님의 댓글

  저는 일년전에 한 번 정독을 해 보았으며
많은것을 배울수 있는 아주 훌륭한
논문으로 산악 사진을 하시는
우리 회원들에게는 고귀한 자료가 될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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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래님의 댓글

  고문님의 지리산 사랑을 알 수 있을 듯 합니다.
자주 정독하여 앞으로의 사진 생활에 지표로 삼으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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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용님의 댓글

  본인은 정회원은 아니기 때문에 인사말씀 밖에 드리지 못합니다.
사진과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재섭씨가 소개 해 주신
엄영섭 고문님의 논문을 읽게 된 영광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한국산악 사진작가협회에 무궁한 발전있기를 기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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